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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쯤인가 나는 태국 이싼지방 소도시 피마이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곳은 피마이 유적 이외에 딱히 볼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작은 시골 동네이다. 도시라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태국에 살면서 어디 여행을 다닌적이 별로 없었다. 늘 도서관에 있거나 늘 직장에 있거나 돌이켜보면 내 삶의 매 순간 어느 한켠에 평온함이 있었던 것 같다. 어딘가 늘 감상에 젖어 있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들긴 했지만 그러나 정작 실천해본 적은 별로 없다. 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정말이지 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막상 떠날 수 있는 순간에도 나는 그냥 집에 있었다.
예전에 교환학생 시절에는 학기가 마무리되고 집에가기까지 한달 남짓 정도 남았었는데 그 시절 후배들과 친구들은 모두 삼삼오오 모여 전국투어 여행을 떠났다. 치앙마이며 푸껫이며 유수의 관광지들을 향해 밝은 얼굴로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함께 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일은 나눌 수록 즐거운 법이다.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 당시 가져온 돈이 얼마 남지 않아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삼십만원 남짓이었는데 태국에서의 남은 한달 남짓을 하루에 만원씩 쓴다고 가정할 경우 생활비로 나가는 돈이 무척이나 빠듯했기 때문에 애시당초 여행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작은 월셋방을 잡았었는데 그 자취방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담하고 예쁜 곳이었다. 그렇게 오갈데가 없던 나는 아침 일찍 어색한 태국어로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서 40분이나 걸리는 동네 백화점 카페에 가곤 했다. 거기서 나는 태국어 공부를 했다. 그때 공부했던 작고 노란 단어집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억지로 쑤셔넣었던 것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교환학생으로 유학 생활을 마친 이후 본격적으로 석사공부를 할 때 나에게 석사 생활에 큰 길 안내를 해주신 선배가 계셨다. 내가 두차례나 석사 시험 고배를 마시고 매우 힘들어하고 있을 시절에 나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낙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나에게 위로는 커녕 내가 너무 찌질해 보여서 뭐라고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선배가 나에게 해준 말을 잊을 수가 없는데 "네가 돈이 별로 없는 줄 알았으면 네가 석사공부를 하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었이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타박같은 훈계를 하셨는데 저런 인자한 표정으로 사람에게 이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나는 의문이었다. 그 선배는 내가 석사 공부를 시작하는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 당시 그 선배가 알려준 언어학 입문서 리스트를 받지 못했다면 나는 빠르게 Onboarding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몇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곤 하셨다. 상처가 되는 기억들이 몇가지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다 이해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찌하랴! 요새의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 알겠더라. 공부는 돈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여유있는 자들의 교양-고급취미가 아니란 것을. 나는 그 선배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이 선배와 내가 결정적으로 일치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인지라! 감사한 일들을 기억했다. 내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불평하지 말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의 경로를 갈 것! 신앙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가난한 나를 내려놓고 무제약자를 향한 무한한 귀의와 믿음. 스스로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올바른 내려놓음. 그래서 직장생활도 학교생활도 신앙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절대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복종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내밀하고 고귀한 심장이다.
선배님께 배운 것은 참으로 많았지만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조소를 금치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사실 자기도 젊었을 때 녹록치 않은 환경에서 공부하지 않았는가? 자기 한계를 시험하며 앞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깨부셔가며 경계를 돌파해갔으면서, 인고의 시간 끝에 성취라는 열매를 맛보았으면서 후배들한테는 돈이 없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공부하라고 얘기 안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얼마나 큰 교만인가. 얼마나 큰 자만인가. 내가 한계를 극복해가면서 앞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은 인간극장, 성장 스토리이고 후배들이 장벽 앞에서 좌절하고 쓰러지려고 할 때 찌질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교만인가! 단호하게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요새는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조금 불편해지곤 한다.
나는 유학생활 내내 별의 별 고생스러운 일들을 통해 특별한 돈을 들이지 않고 온갖 내밀한 지식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후배들에게 댓가없이 아낌없이 공유했다. 그런 것은 돈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내가 스스로 이루었다고 믿는 그것들이 사실은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절과 인연이 내 젊음과 만나 이루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결코 나 혼자 유아독존해서 내 노력과 내 땀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따라서 내가 받은 것과 같이 돌려주는게 이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으로 떠올려보면 태국어란 딱히 돈이 안되는 언어인지라. 사람들에게 공유를 해줘도 그것의 진가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그래서 모든 네이버 커뮤니티를 포기했다. 공부는 돈이라기보다는 신앙이다. 매일 매일 기도하는 성실함만이 나를 지켜준다. 열매를 취하고 교만해지면 사라지는 달콤함이란 얼마나 공평한가!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십대의 나는 감정기복이 무척이나 잦고 내 스스로도 그것을 통제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우울함이 올라오면 나는 저 깊은 바다-깜깜한 밤 오케아노스를 향해 스스로 침잠해들어가곤 했다. 이 시기에는 그런 깊은 어둠이 찾아오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심지어는 새벽 한시에 학교 정문을 넘어가 운동장을 걸어다니곤 했다. 자정의 별빛으로 온 마음을 물들였다. 별밤을 한참동안 배회하고 나서야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런 우울감이 찾아오면 한편으로는 거대한 창작 욕구와 평소의 의식상태에서는 낼 수 없는 깊은 표현들이 나온다. 그걸 잘 활용하면 나름대로 장점도 있지만 통제하지 못하는 어두운 밤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이제와서 그런 마음들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내 신앙이 보다 세련되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학생 시절 수중에 남은 삼십만원은 나를 무척이나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는데 사실 빠듯하게 살다보면 인간사에 로망이랄 것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무엇인가 무척이나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가여운 나의 이십대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때의 괴로움은 지금의 추억이다. 그때 한잔에 60바트짜리 커피를 하루에 두세잔 사먹어도 집 근처에서 쌀국수나 카우만까이를 한두그릇 사먹을 돈이 남았으니 그래도 할건 다하면서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거기서 커피 빨면서 공부하는 애송이였을 동안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부장님은 회사에서 얼마나 일을 조지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경력이라는게 참 아득해진다.
아무튼 돈이 있건 없건 애시당초 나는 혼자 먹고 마시는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직장에서 상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한정해서이다. 사실 그건 내 기호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이야말로 인간의 영혼 깊은 곳 까지 파고 들어가 닫힌 문을 열어재끼는 화성-금성의 마법이 아닌가. 그러나 혼자일 때는 다르다. 먹고 마시는 여행보다는 나는 대개 감상에 빠지는 여정을 좋아한다. 이동 중에 사색을 즐기는 편이고 저녁에는 뜨끈한 온천을 즐기는 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는 한적한 그늘과 따뜻한 햇빛이 드는 시골 길이 있는 곳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때가 어느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나는 어디론가 부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특히 오래된 사원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마음에 침습한 동기는 축축한 흙더미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초목과 같았다. 비온 뒤 젖은 땅을 헤짚고 올라오는 죽순과 같이 나는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한 짐을 꾸리고 북부터미널로 향했다. 햇살이 얼마나 청명하던지 가장 좋아하는 셔츠를 입고 얼마 전에 새로 산 단화를 신었다. 그런 설레는 기분을 느낀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나는 현관문에 쏟아지는 햇살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매일 나서는 똑같은 현관문을 지나는 것인데 어째서 이 작은 목조문에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것일까.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에서 피어오르는 고귀한 신비가 나를 재촉했다.
피마이로 가려면 나컨랏차시마-코랏을 거쳐야 한다. 코랏이야말로 이싼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이싼지역 소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노선이 있다. 번개를 내리쳐 강줄기를 흩어놓았다는 시바신의 창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여정에 걸리는 시간을 무척 지루해하는 편인데 방콕에서 코랏까지는 무려 네시간 반이나 걸린다. 네시간 반이면 방콕에서 서울로 날아가는 시간과 비슷하다. 네시간이라니 정말이지 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제일 좋은 1등석 에어컨 관광버스를 타고 코랏으로 향했는데 처음가는 길이라 그런지 지나는 풍경마다마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어색함과 낯선 풍경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사실 광역 버스가 모이는 터미널에만 와도 정말 여기가 태국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곤한다. 익숙한 도시 풍경에서 벗어나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그야말로 생소한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제 익숙하다 못해 넌덜머리가 나는 태국어도 이런 장소에 오면 나도 모르게 더듬기 마련이다. 방콕을 떠난지 두시간 정도가 될 무렵에 해는 이미 스믈스믈 저물고 있었다. 저무는 해는 스무살 우리집 밥짓던 냄새를 떠오르게 한다. 밥솥이 끓는 소리와 저무는 해는 늘 나의 인식에서 겹치곤 한다.
고슬고슬한 밥 생각이 났을 때 버스 승무원 남자애가 맥도날드 앞즈음에서 차를 세우더니 갑자기 큰 박스 하나를 갖고 올라왔다. 뭘 주섬주섬 꺼내서 나눠주는가 했더니 맥도날드 치즈버거였다. 감동. 특등석 버스라고 이런 것도 주다니 소박한데 괜히 좋았다. 콜라도 없고 감자튀김도 없이 오직 심플한 치즈버거 하나. 나는 알싸한 피클이 들어간 치즈버거가 좋다. 코랏에 내릴 때즘이 되니 하늘은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지방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탈 때 태국어와 태국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참 난감한 순간들이 온다. 승무원 언니가 목적지에 도달할즘이 되자 승객들에게 어디서 내려줄지 일일히 물어보았다. 사실 이때 내가 원하는 특정한 포인트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내려주는 일은 없다. 다만 종점 가는길 근처에 네가 원하는 포인트가 있다면 내려줄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이 질문에 상당히 고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나는 코랏에 처음가보는 사람이거니와 그 근처에 랜드마크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구글맵을 켜서 호텔 주소를 보여주었는데 승무원 언니가 뭐지 얘는..? 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보길래 나도 당황에서 그냥 종..종점? 에서 내릴게요 라고 했다. 옆에 있던 태국인 친구가 그냥 센트랄에서 내리는게 갑이라고 알려줬다. 하긴 센트랄 같은 랜드마크에는 모든 대중교통과 택시, 오토바이들이 모두 스탠바이하고 있을 터였다.
백화점 앞에 내려 화장실을 다녀오니 백화점 문닫을 시간이라 허기를 채울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상점 밖으로 나왔다. 이제 태국생활 만렙이라 어디서 길 헤맬일은 없지만 그래도 지방도시에 처음 와보니 사뭇 느낌이 달라 생소했다. 도시의 풍경이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과 같아서 작은 불빛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색깔은 무척이나 또랑또랑하게 귀에 들어온다. 호텔을 어찌가야하나 고민하다가 랍짱 아저씨한테 호텔 주소를 대니 딱 알더라. 이번 여행에서 생전 듣도보도 못한 약간 허름한 호텔에 투숙했는데 나의 경우 워낙 여행을 안다녀봐서 그런가 호텔을 고르는 눈썰미가 없다. 겉보기에는 꽤 괜찮아보여서 골랐는데 영 오래된 호텔이었다. 호텔 근처에는 야시장이 있어 아홉시쯤 가니 어찌나 많은 먹거리들이 있던지 하나같이 다 맛있어 보였다. 카우만 까이와 스파게티 까르보나라 그리고 만두, 치킨같은 것을 잔뜩사서 왔는데도 2백밧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맛없는 카우만까이는 정말 생전 처음 먹어보았다. 스파게티는 그냥 기대 안하고 샀는데 정말 기대 못할 맛이었다. 치킨과 만두는 튀김이잖아. 튀김은 맛없게 만드는게 힘드니까 이건 먹을만 하겠지 싶었는데 역시 맛있었다. 기름이 맛없을리가 있나. 그리고 감자칩을 두봉지나 까먹고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는 진한 블랙커피를 세잔이나 타마시고 피마이로 향하는 광역버스를 탔다. 이싼지방의 낯선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참 생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창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갖 숲과 농작물들 뿐이었다. 버스에서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작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버스에서 책을 그렇게나 재밌게 읽던 적 이 없었던 것 같다. 얇은 책이라 금방 읽었던 탓도 있지만 카페인에 취해 모락모락 올라오는 기묘한 감정과 성지를 향하는 나의 마음 그리고 철학자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미 내 정신은 사다리를 타고 저만치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술취함과 같은데 일상 가득한 풍경 속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성스러움에 압도당할 수 있다면 그런 기분일 것이다.
태국의 광역버스들이 대개 그렇듯 내가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내 목적지는 언제쯤 도착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안내방송 따위는 없다. 그냥 구글맵을 보면서 어디쯤 와있는지를 가늠하며 안내양한테 내가 원하는 행선지가 가까워지면 꼭 말해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코랏에서 한시간도 달리지 않은 것 같았는데 나는 피마이에 도착했다. 피마이는 정말로 정말로 작은 읍내같은 곳이었는데 피마이에 도착한 날 하늘이 무척 우중충했다. 바람은 어찌나 시원하게 불던지 나는 날씨에 한번 더 취할 것만 같았다. 피마이 유적이 있는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긴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다리를 지나가면서 나는 피마이에 방문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몇번이고 했다. 조용히 흐르는 강을 보니 내 마음도 그렇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고요함이란 무릇 그런 것이다. 늘 잊어버리곤 한다.
이 시기는 코로나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외국인 출입국도 여전히 까탈스러운 때였는지라 이 작은 읍내에 외국인 관광객이라곤 딱 나 혼자만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역사공원 내에 사람이라곤 정말 나 혼자만 있는 기분이었는데 나는 이 큰 유적을 둘러보면서 과연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채와 분위기에 서서히 젖어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유적의 내부 구조는 금방 머릿속으로 조감도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느낌이었지만 벽면마다 수놓아진 구도자들의 조각들을 보면 이곳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보통의 공간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온전히 보존된 불상에서는 따스한 미소들이 번지고 있었는데 연좌를 하고 있는 불상 위로 새가 날아들어 앉았다. 나는 그 공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느라 몇가지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지는 못했다.
이런 한적한 공간에서 잠깐 명상을 해보는 것은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우주의 중심이라 부르는 성지가 아닌가. 집에서 책상에서 그냥 빠져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여기 한번 와보겠다고 편도로 6시간을 달려서 왔으니 하늘도 이정도면 쌉인정 탄복할 노릇 아닌가. 아쉽지만 그런저런 일들은 생략했다. 다음에 또 간다면 진언 10분으로 깊은 곳 까지 들어갔다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설레는 일이다.
피마이를 한 두세시간 구경하고 시간이 남아서 인근에 있다는 보리수 숲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피마이에 온 마음을 뺏겨 정신을 놓고 있던 바람에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시곗바늘은 이미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읍내에 있는 작은 정류소 표지판을 꼼꼼히 보니 막차가 네시에서 다섯시면 끝나는 분위기였다. 보리수 숲을 꼭 들렸다 오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곳은 방문할 수 없었다. 정말 아쉬웠지만 마지막 롯뚜를 타고 피마이 읍내를 빠져나와 다시 코랏으로 돌아왔다.
피마이 여행은 지금도 생각이 날 정도로 정말 온몸이 정화되는 여정이었다. 이제 관광객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니 아마 지금 다시 방문한다고 해도 그때와 같이 한산했던 읍내와 유적의 빛깔을 다시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고보면 여행-힐링이란 비우는 것이다. 온몸에 가득한 찌거기들과 불에 탄 흔적들을 더 자극적인 향과 맛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털어내고 비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의 유적이 나를 부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에퀴녹스는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를 생각하며 나 또한 교만해지는 내 마음을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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